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왜구의 공세와 수군 양성 계획 === 조금 잠잠했던 왜구는 이제 또다시 막강한 세력으로 고려를 공격했다. 왜구는 1371년에도 극성을 떨쳐, 3월에는 [[황해남도]] 해주(海州)를 공격하여 '''관아에 불을 지른 후 해주 목사의 [[부인]]과 [[딸]]을 납치해서 도주했다.''' 7월에는 왜구가 예성강(禮成江)으로 진입하여 '''고려 전함 40여척을 불태워''' 병마사 김입견(金立堅)을 장형에 처한 후 안산(安山)으로 유배보내는 일이 있었으며, 8월에는 왜구가 봉주(鳳州)를 공격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동강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로 양백연을, 서강도지휘사(西江都指揮使)로 '''이성계'''를 임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여진족, 홍건적, 몽골 군벌 등과 싸우던 이성계는 1372년에는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어 '''본격적으로 왜구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1372년에는 간관(諫官)들이 '''전라도의 조운은 항상 왜구에게 약탈 당하므로''' 차라리 육로를 통해 세미를 걷어야 한다는 제안을 올렸다. 이 해 2월에는 왜구가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인 백주(白州)를 공격했으며, 3월에는 [[순천시|순천]], [[장흥군|장흥]]과 현재의 [[강진군|강진]], [[영암군|영암]] 등을 공격하며 전라도 지역을 들쑤셔 놓았다. 또한 4월에는 원산에 설치해놓았던 조창(漕倉)인 진명창(鎭溟倉)이 약탈 당했으며, 6월에는 [[강릉시|강릉]], [[영덕군|영덕]], [[원산시|덕원]]이 왜구에 당하고 말았다. 이때 고려군은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소리만 듣고도 달아났다.''' 헌데 당시 이옥(李沃)이라는 인물이 그 지역에서 관의 노비로 있었는데, 이옥은 [[신돈]]의 일파였던 [[이춘부(고려 후기)|이춘부]](李春富)의 아들로 신돈이 척결되고 이춘부가 처형되자 노비로 끌려온 처지였다. 그런데 본래 용맹으로는 이름이 있어, 급한 김에 지방의 부사와 안렴사가 이옥에게 군사를 주어 왜구를 치게 하자 절호의 기회를 잡은 이옥은 용맹하게 싸워 왜구를 물리쳤고, 이 때문에 해방될 수 있었다. 또 이 무렵에는 안변(安邊)과 함주(咸州) 역시 공격 당했는데 안변부사 장백안(張伯安)은 제대로 수비하지 못해 곤장 87대를 맞기도 했다. 또 안변으로 다시 몰려온 왜구들은 부녀자를 납치하고 미곡 1만석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함주와 북청주(北靑州)를 침공하다가 만호 조인벽(趙仁壁)의 매복에 걸려 70여명이 죽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홍주(洪州)를 침공하는 6월 달에만 무려 5번의 왜구 침공이 있었다. 또한 7월에는 왜구가 양광도(楊廣道)를 쳐들어 왔으며, 9월에는 양광도 순문사 조천보(趙天輔)가 용성(龍城)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패해 전사하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명나라의 홍무제는 제주도의 목호들과 왜구와의 연계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여 공민왕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전 너희 나라에서 탐라의 목자(牧子)에 관한 일을 아뢰기 위해 표문을 가지고 왔다. 내가 생각해보니 탐라의 목자들은 원나라 몽고인으로 당초 가축 기르는 일을 가업으로 삼을 뿐 농사 지을 줄도 모를 것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탐라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무리들이다. 그놈들은 지난번 너희 나라에서 목사로 파견한 윤재상(尹宰相)을 살해했다. 하지만 너희들의 국왕은 만약 그놈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면 그들이 자신의 호의를 알지 못한 채 딴 마음을 품고 공연한 사단을 저지를까 우려한 나머지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놈들이 어찌 이 같은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내가 지금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국왕에게 상세히 나의 말을 전하라. 절대로 그놈들을 얕보지 말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깡그리 소탕하라!" > >"듣건대 너희들 나라에서는 왜적들이 마구 날뛰며 바닷가 고을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피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적들을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해적들이 바다를 건너와 우리 땅까지 노략질하기에 나는 바닷가 고을의 수어관(守御官)에게 명령을 내려 왜적의 배 13척을 나포하게 했다. 만일 탐라의 목자들이 이 왜적 무리들과 합세한다면 토벌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 >《고려사》 공민왕 21년 한편 과거 이작도 해전에서 두 눈뜨고 보기 힘든 추태를 보였던 고려의 수군은 이 무렵에도 또다시 망신을 당했는데, 10월 왜구가 양천을 공격해 오자 고려군은 이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으나 수전에 익숙치 못했던 고려군은 그야말로 떡실신을 당했고, 고려군 원수의 깃발과 북 등을 탈취한 왜구는 '''강화도까지 가서 강화도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넘겨주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왜구의 공세가 최근 몇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세지는 와중에서도 고려군, 특히 수군이 개막장 상황을 이어가고 있자 공민왕 역시 뭔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듯 보인다. 양천의 대패가 있은 직후 공민왕은 즉시 5군을 이끌고 승천부(昇天府)로 향했으며, 이후 인월곶(仁月串)으로 가면서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인물이나 교량 등의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인물들을 모두 강경하게 처벌했으며, 이후에 수군 사열을 실시했다. >을미일. 왕이 경포봉(經浦峰)에 올라 함선을 살펴본 후 용천사봉(龍泉寺峰)에 유숙했는데 호위 태세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제조관(提調官)들을 장형에 처했다. >----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고려사]]》의 기록들 중에 왕이 군대를 사열하는 기록들이 없지는 않지만, 특별히 수군을 사열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강력해지는 와중에서 막장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수군에 대해 공민왕이 이를 강화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수군에 대한 고려 내의 일부 여론은 우현보전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용론|‘적은 선박의 운항에 능하니 해전으로는 안 된다. 만약 함선을 건조한다면 백성들을 더욱 곤궁에 빠뜨릴 뿐이다.’]]라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의 도적들이 육지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사실입니다. 또한 적을 물리쳐 포악한 행위를 못하게 하는 것은 당초 백성을 위한 일인데도, 백성들에게 끼치는 작은 폐해를 염려하여 나라 전체에 큰 근심을 끼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지금 동·서강(東西江)에 모두 방어군을 배치했으나 적이 바다를 통해 의기양양하게 침범해 오면 아군은 해안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니 아무리 백만의 정예군이 있다한들 바다에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전함을 건조하고 병기를 착실히 준비한 다음 조류를 따라 멀리까지 적을 몰아내고 요충을 막아버리면 적이 아무리 물에 익숙한들 어찌 날아 건널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놈들을 사로잡고 소탕하는 일도 반드시 가능할 것입니다." >---- >'''《고려사》 우현보전''' 즉 [[무용론|'''어차피 왜구하고 해전으로 맞짱 떠도 발리기만 하니, 함선 건조는 백성들 귀찮은 일만 만드니까 하면 안된다''']] 는 여론이 있었던 것. ~~현 [[대한민국 해군]] [[높으신 분들]]이 보면 [[피거솟]] 할듯.~~ 물론 당시 상황을 보자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고, 이후 [[진포해전]] 등에서 증명되었듯 강력한 해군력이야 말로 왜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찌되었건 대략 이 무렵부터 수군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현보의 경우는 왜구를 막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개중에서도 수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여 설명했다. 또한 1374년에는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수군으로 왜구를 막아야 한다.' 는 대책을 올리자 공민왕은 이를 칭찬했으며, [[정지(고려)|정지]](鄭地) 역시 수군 양성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하자 즉시 전라도 안무사(安撫使)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 외에 최신길(崔臣吉)과 박덕무(朴德茂) 등도 이렇게 해서 경기왜인추포부사(京畿倭人追捕副使)가 되었다. 여러모로 공민왕이 수군 육성에 관심이 많이 생긴 듯. 이후 공민왕은 최영과 더불어 수군 양성을 논의하였는데, 최영 역시 이에 동의한 것처럼 보인다. 이때 최영은 '''기왕 키우는 거 왕창 키우자''' 는 심리인지 '''전선 2,000척 건조 계획'''이라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최대 규모인 [[진포해전]] 당시 왜선의 숫자가 500척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히 어마어마한 계획. 그러나 당연하게도 백성들의 반발이 너무나 심해서 결국 그 정도 수준의 선박 건조 계획은 철폐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최영은 여러 차례 수군 전력의 확대에 관심을 보였다.] 어찌되었건 고려군은 왜구 침입을 계기로 수군 전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